• 2023. 3. 15.

    by. 무꾸 Muccu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속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첫눈에 반한 사랑

     

     

     

     

    누군가 내게 

    "당신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나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외면하며

    "손톱만큼요"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잘라내도 잘라내도 

    평생 자라나고야 마는

    내 손톱을 보고

    마음이 저려 

    펑펑 울지도 모른다

     

    - 왕구슬, 손톱깎이

     

     

     

     

     

    결말이 따뜻한 한 편의 소설 속

    너와 내가 주인공이길 바랐지만

    너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일생을 읽는 동안

    나는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 장을 엎을 때까지

    지문에 눈물만 뭍혀가며

    말 없이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고작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 1'이었다.

     

    - 서덕준, 등장인물

     

     

     

     

     

     

    역사적인 현실이 우리에게 전해준 긴장은 곧 풀리게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죽은 물 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다.

    우리들이 맨 처음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신뢰성이나 그 현실의 표정, 책임감, 에너지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점점 더 힘을 잃어가기만 했다.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 나는 현실의 표정, 에너지, 곧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에 활기를 주고 싶었다.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반면에 나는 완전히 열정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항상 부족함과 슬픔을 느꼈다.

    때때로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분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가 젊기 때문이다.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오르텅스 블루, 사막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만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 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남진우,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류시화, 소름인형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김남조, 편지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 이정하,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 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 나가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 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령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 이상, 이런 시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롯이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 나태주, 내가 너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나태주, 멀리서 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랄루딘 루미, 봄의 정원으로 오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말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 집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및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